보통 전시는 작품이 완성된 뒤 시작됩니다. 작품이 제작되고, 제목이 붙고, 작가노트와 비평문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작품을 먼저 언어로 묘사하고, 그 작품의 작가와 제작 연도, 재료, 전시 이력, 비평적 의미까지 만들어낸 뒤, 비로소 그것을 이미지와 음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오프커 레시피랩 1차 수강생들은 알렉산더 레벤(Alexander Reben)의 〈AI Am I?〉에서 출발해, 저마다의 ‘존재하지 않는 전시’를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더 레벤의 〈AI Am I? (The New Aesthetic)〉는 인공지능이 상상한 작품을 인간이 현실로 옮기는 인간–기계 협업 프로젝트입니다. 레벤은 신중하게 작성한 ‘시작 텍스트(start text)’를 GPT-3에 입력하고, 존재하지 않는 작품의 설명과 제목, 해석, 인용문 등을 생성했습니다. 가상의 작가명은 이름 데이터를 학습한 별도의 신경망으로 만들고, 출생지와 생년월일, 작품 제작 연도는 맞춤형 알고리즘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때, 인공지능의 첫 번째 출력을 그대로 작품으로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 레벤은 수백 개의 결과 가운데 흥미로운 문장을 선별하고, 선택한 문장을 다시 시스템에 입력해 새로운 설명을 생성했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작품의 개념과 서사를 확장한 뒤, 최종 결과물을 직접 제작하거나 타인에게 의뢰하고, 이미지 생성기로 시각화하거나 텍스트 자체를 전시장의 벽면 라벨로 제시했습니다. 크로커 미술관은 이 방법을 “인간이 AI를 프롬프트하는 대신, AI가 인간을 프롬프트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생성은 기계가 시작하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발전시키고, 물질화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판단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AI Am I? ARTificial Intelligence as Generated by Alexander Reben | Crocker Art Museum
레시피랩에서는 알렉산더 레벤이 공개한 방법론을 포킹(Forking)해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 했습니다. 수강생들은 가상의 작가와 작품을 생성한 뒤, 프롬프터의 피드백을 통해 작품의 형태와 해석을 반복해서 수정했습니다. 이어 미드저니로 전시 장면을 시각화하고, 수노로 작품과 전시 공간을 위한 사운드트랙을 제작했습니다. 그렇게 언어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이미지와 음악, 작가의 이력과 비평문을 갖춘 하나의 가상 전시로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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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예술가, 엘라 메이(Ella Mae)의 〈기념비적 패스트푸드〉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 햄버거와 탄산음료 병을 거대한 기념비처럼 세운 대지미술 작품입니다. 현지 암석과 네온 컬러의 콘크리트로 제작된 조각들은 각각 15~20미터에 이릅니다.

팝아트의 친숙한 도상을 지질학적 규모로 확대한 이 작품에서 패스트푸드는 더 이상 가볍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 미래에 발견될 ‘인류세의 유물’이 됩니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극심한 일교차로 네온 도료가 벗겨지고 콘크리트가 침식되면서, 화려한 소비문화의 표면 아래 감춰졌던 거친 암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작품은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의 시간이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흔적을 어떻게 지우고 다시 대지의 일부로 되돌리는지를 상상합니다. 미드저니로 구현된 전시 풍경과 수노로 제작한 묵직한 포스트록 사운드트랙은 이 가상의 작품에 압도적인 규모와 시간을 부여합니다.
프롬프터: 임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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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예술가, 오르미크 세라필(Ormik Seraphil)의 〈검수 대상 아님〉은 옅은 석영 모래 위에 깨진 백색 도자기 조각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조각 사이를 가느다란 면사로 연결한 바닥 설치 작품입니다. 원의 중심에는 검은 주철 덩어리 하나가 놓여 전체 구조를 고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품 주변에는 분필선과 정렬 표시, 측량 흔적, 작은 고임목과 줄자처럼 설치 노동의 흔적이 의도적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완성된 조형물과 그것을 제작하고 관리한 과정이 하나의 풍경 안에서 공존하는 것입니다.

중앙의 무거운 주철 덩어리는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다만 자연은 인간에게 작업지시를 내린 적도, 완공 일정을 정한 적도, 검수를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인간만이 선을 긋고 공정표를 만들며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검수 대상 아님〉은 이 분주하고 진지한 노동을 건조한 유머로 바라보면서, 인간이 구축한 질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습니다.
프롬프터: 박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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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의 목적은 실제 작품처럼 보이는 가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언어만으로 작품과 전시가 어디까지 생성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가상의 작품은 물리적 제작에 필요한 자본과 재료, 작업 공간의 제약을 잠시 유예합니다. 아직 제작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먼저 설명하고 비평하는 일종의 ‘선(先)비평’을 거치면서, 불가능하거나 지나치게 거대해 실현하기 어려웠던 작업도 구체적인 형태를 얻습니다. 프롬프터는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생성된 문장을 고르고 버리고 다시 입력하면서 작품의 방향을 결정하는 작가이자 큐레이터, 편집자가 됩니다.
언어는 이미지로, 이미지는 음악으로 번역됩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의 의도와 다른 형태가 나타나거나, 모델이 만들어낸 오류와 과잉 해석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번역의 어긋남과 우연한 창발성이 이번 실험의 중요한 재료입니다.
레시피랩의 ‘존재하지 않는 전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품 세계를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률과 패턴, 그리고 인간의 선택과 판단을 통해 시뮬레이션합니다. 작품은 아직 현실에 없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보고 듣고 해석하며 비평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실험의 결과물은 온라인 도록 〈세상에 없는 전시〉에 담았습니다. 가상의 작가 정보와 작품 캡션, 전시 해설뿐 아니라 작품을 시각화한 미드저니 프롬프트와 수노 사운드트랙, 그리고 각 작업을 설계하고 발전시킨 프롬프터의 이름을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